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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정석

치매가 가져다 준 사랑

by 올드아미 201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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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치매로 인해 고통받는 분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오랜 간병에 지쳐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들의 사연이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는데요.

치매가 어찌보면 가장 무서운 질병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 버리니까요.

오늘은 치매에 관한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픽션이니 오해하시는 분 없기를 바랍니다.


1957년. 어느 마을.
할머니의 이름은 숙희. 나이는 꽃보다 아름다운
17살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려간 마을은 배곯는 사람들 천지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딸을 시집보내기로 했습니다.
신랑은 세 살 연상의 스무 살 청년이었습니다.
양가 아버지들의 일방적인 합의에 의해 진행된 결혼.
할머니는 첫날밤 처음 신랑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걱정투성이였던 할머니의 얼굴은 신랑의 얼굴을 보자 시름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부리부리한 눈, 오똑한 코, 그리고 훤칠한 키가 당대의 미남자였거든요.

할머니는 꿈같은 첫날밤을 보내고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떠났습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그러나
할머니의 장밋빛 상상이 물거품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게 쑥대밭이 된 시대.
남편은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습니다.

밖에서 자고 오는 날도 많았죠.

그렇다고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술도 그렇게 즐기지 않았고 도박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할머니가 정말 힘들어했던 건 남편의 무뚝뚝함이었습니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서도 할머니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일거리가 많아 의외로 많은 돈을 벌어왔을 때도
'여기 생활비'라며 단답형의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모든 대화가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할머니가 집안일이나 아이들 일을 의논하려고 해도
외면하거나  '니 알아서 하라' 고만 할 뿐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말하기 귀찮다는 듯이...

그래도
슬하에 4남매를 두었습니다.
아들 둘, 딸 둘

할머니가 그 외롭고 적막한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자식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차갑게 대했습니다.
칭찬엔 인색했고 잘못했을 땐 비정하게 아이들을 몰아붙였습니다.

동병상련이었을까요.
어머니와 자식들의 사이는 정말 돈독했습니다.

무심했던 남편이지만 돈 버는 데에는 소질이 있었던 듯
생활비 걱정은 안하고 살았습니다.

이따금 TV 드라마에 금슬 좋은 부부가 나오면
할머니는 눈물을 삼키곤 했습니다.


어느덧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 
하나둘 곁을 떠나기 시작하자 할머니의 마음속엔 
다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식들이 할머니에게 황혼이혼을 제안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할 만큼 하셨으니
이제 어머니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무심한 아버지만 바라보고 사실 건가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던 할머니는 세월이 흘러
막내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황혼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막내가 결혼하고 나면
남편과 헤어지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막내의 결혼식이 끝난 어느 날
오늘은 남편에게 결심을 이야기하리라 마음먹고
남편의 방에 들어갔는데...

방안의 풍경이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려있고 방바닥에는 옷들과 책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한가운데 남편이 앉아서 뭘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뭐 하세요?"

그 순간
할머니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이 할머니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혼생활 60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남편의 미소...


할머니는 꿈인가 했습니다.
그러나 

"사탕 어디 갔지?"

"사탕이라뇨???"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이상이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어.. 여기 사탕 있었는데"

남편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습니다.

"아 배고파 밥 주라"

할머니는 상황이 심각함을 눈치채고
장녀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의 상태를 알렸습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자식들.
남편은 자식들을 보자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소?"

자식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리고 버티는 아버지를 억지로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담당 의사와 마주 앉은 가족들은
설마가 현실이 되었음에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노인성 치매입니다.
아직 중증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처방을 해드릴 테니 잊지 말고 약을 복용하게 하시고
다음 진료시간 맞추어 오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또 정신이 돌아오셨습니다"


진료실에 들어간 가족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에는
작은 이슬방울이 맺혀있었습니다.

"치매인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는 할아버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난감한 얼굴이었습니다.



한 달 뒤
할머니와 자식들은 방안에 둘러앉았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할머니를 몰라볼 때도 있었고 손주들의 과자를 뺏어 먹다가
손주들과 말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성인용 기저귀를 차야 했습니다.

그 모든 수발을 할머니가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자식들이 할머니를 찾아온 것이었죠.


자식들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고 보살펴 드릴테니
어머니는 이제 저희와 같이 여행도 다니시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라며 할머니를 설득했습니다.

2018년 9월 12일은 결혼 60주년.
할머니는 집에서 결혼기념일 식사는 하고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드려야 되지 않겠냐며
자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식들도 그 말에는 수긍을 하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기념일.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며칠 굶은 사람마냥
음식을 탐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에 다시 한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는 졸립다며
그 자리에 누워 코를 고셨습니다.

장녀는 요양원에 예약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 생긴 곳이어서 시설도 깨끗하고 시스템도 잘 갖추어진 곳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니는 아무 걱정 마시라는 자식들...

묵묵히 듣고 계시던 할머니가 이윽고 입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너희들 뜻은 잘 알았다. 이 애미를 위하는 마음도 잘 알겠고
사실 처음에는 요양원에 너희 아버지 모시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얘들아,

이 엄마 요즘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깜짝 놀라는 자식들..

"그동안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무뚝뚝했니?
그 무심함에 가슴에 한이 맺혔었는데...

그런데 요즘은 쉬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거신 단다.
내가 귀찮을 정도로.. 호호호"


자식들은 어머니가 이토록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못한 대화를 이제야 다 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정상은 아니시지만 이 애미는 속이 다 시원하단다."

"그리고 어젯밤에 아버지가 잠깐 정상으로 돌아오셨을 때 

 나더러 뭐라 그러셨는지 아니?"

"숙희야. 그동안 내가 많이 미웠제.
용서해 주라.
나 그동안 당신 고생한 것 다 안다.
못된 남편 만나 마음고생만 하고 미안타,... 그리고 고맙다"

할머니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쌓인 설움과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품에 안겨 오래 정말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토닥거리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손의 감촉을 느끼며...



"아버지는 나하고 계속 지내실거다.
나도 아직은 건강하고...
그리고 아버지도 나 없으면 안 되고...
내가 그리 결정했으니 너희들도 그런 줄 알아라."

어머니의 말씀을 듣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할 거란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행복하시다면야...')

집을 나서던 자식들은 일일이 어머니와 포옹을 했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저희들 자주 올게요."

자식들의 얼굴도 올 때와는 달리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

.

.
.
어느 날.
할머니는 새벽에 화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딸이 사준 화장품을 처음 발라본 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우리 색시 예쁘다며 칭찬을 했거든요.

할아버지가 깨시기 전에
화장을 하고 김밥 싸는 걸 마쳐야 했습니다.
오늘은 할아버지와 공원에 소풍을 가기로 했거든요.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숲길을 걷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행여 할아버지를 잃어버릴 새라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마침내 되찾은 단 하나의 사랑을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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